• 최종편집 2024-03-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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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나 돌잔치와 같이 기쁜 자리는 그저 축복만 해주면 되지만, 장례식은 그렇지 않다. 죽은 사람의 삶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자리다. 갑자기 날아든 비보, 늦어도 발인 전에는 가야하니 시간이 빠듯하다. 늦은 밤 퇴근하고 얼굴이라도 비추면 다행이다. 조의금이나 조화로 인사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추모는 어렵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니 당연한 것일까. 형식만 남아버린 장례에 경종을 울리는 작은 종이가 있다. ‘조문보(弔問報)’다. 고작 4쪽에서 8쪽짜리 ‘조문보’는 고인, 유족, 조문객 모두에게 의미 있는 장례식을 만들어준다. 

 

 

달라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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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발달로 생명 연장은 실현됐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다. 웰빙을 넘어 웰다잉(존엄사)이 거론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두렵고 슬픈 것’에서 ‘아름답고 소중하게 갈무리해야 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로 달라지고 있다. 장례문화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사전의료의향서’와 ‘사전장례의향서’를 쓰기 시작했다. 상업화되고 천편일률적인 장례문화에 새바람이 분다. ‘조문보’ 역시 그중 하나이다. 기록으로 하는 추모다. 동시에 조문객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초대와 감사의 인사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천상병) 중 일부 발췌

 

협동조합 은빛기획은 부고를 받으면 유족을 인터뷰한다. 서면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고인의 출생, 가족관계, 학업, 사회이력 등을 묻는다. 마치 이력서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의 이력도 포함된다. 고인이 운명한 때와 장소 그리고 장례식, 발인, 장지 관련 내용을 적어 보내면, 작가는 고인의 일생을 짧은 글로 정리한다. 6~7시간이면 장례식장에 조문보가 도착한다. 밤에 글을 쓰는 경우도 있고, 장례식장 인근 인쇄소를 찾지 못해 발을 구를 때도 있다. 하지만 실수는 절대 안 된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고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짧은 장례식, 긴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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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기획에서 조문보를 처음 기획한 노항래 前 대표

 

 

협동조합 은빛기획은 2013년에 만들어져 자서전 사업과 ‘내 삶 쓰기’ 사업 등 삶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2014년부터 조문보도 만든다.(www.mylifestory.kr) 조문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은빛기획 노항래 전 대표다. 노 전 대표는 50대 중반 한창 나이에 막역한 친구를 떠나보냈다. 형식만 남고 아무것도 없는 장례식이 싫었다. 조문보는 고인과 유족에게 건네는 선물이었다. 유족에게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됐다. 


김석주 님은 철도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한 투쟁에 앞장섭니다. 뜻이 강한 만큼 시련의 날은 깊고 길었습니다. 

 

94년 2월 해고되었고, 10년 동안 철도노조 해고자로 생활합니다. 2004년 10년 만에 복직됩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발목 잡았습니다. 2006년 편도암을 확인했습니다. 

 

병고는 깊어졌고, 기어이 2014년 3월 28일 운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택에서 요양 중이던 밤, 각혈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침 동트는 시각 운명하셨습니다. 가족, 동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사랑하듯 살아낸 이가, 자신의 몸에 깃든 암세포를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 故 김석주 님의 조문보 중 일부 요약 발췌


“故 김석주, 나의 친구였어요. 20대 중반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난 한 살 터울 형이에요. 구로동에서 아래윗집 살던 이웃사촌이기도 했고요. 형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형의 일생을 정리해보았어요. 형수에게 사진을 몇 장 받고, 제가 알고 있는 형의 살아온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게 첫 조문보에요.” 

 

 

장례에 의미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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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이 된 형수는 너무 고마웠다. 조문객도 조문보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가져갔다. 조문보가 있어 의미와 감동이 있는 장례식이 됐다. 그 후로 은빛기획은 100여 개의 조문보를 더 만들었다. 조문보에는 고인이 살아온 이야기, 고인이 남긴 유언 등을 기록했다. 


그중에 화제가 된 것은 故 신해철 씨 조문보였다. 첫날 2,000부, 다음날 5,000부, 장례가 끝난 후에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로부터 조문보를 찾는 연락이 이어졌다. 故 백남기 농민의 조문보는 자그마치 2만 부를 배부했다. 단일 조문보로는 가장 많은 양이다. 그밖에도 위안부 할머니, 故 노회찬 대표의 조문보 등도 제작했다.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진 않는다.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지인들이 만들었고, 나중에는 알음알음 알고 의뢰가 들어왔다. 아직 체감할 만큼 확산되진 않았다. 하지만 노 전 대표는 조문보가 언젠가 대중화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남은 사람들이 고인의 삶을 회상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게 장례 본연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생전에 치루는 장례식, 거품을 뺀 ‘반값장례’ 등 다양한 시도가 있어요. 비용도, 규격도 점점 작아질 거예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형식보다는 의미를 찾는 장례로 변하지 않겠어요?”

 

 

이만하면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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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장례 절차가 시작되면 정신없다. 슬픔과 충격에 빠져 조문보를 만들 생각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조문보에 관심이 있고 부모 또는 자신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은 사람은 생애보를 만든다. 생애보를 간직하다가 조금 고쳐 조문보로 쓴다. 


“우리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세요. 생애보를 만들어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르신들은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기록하고 싶어 해요. 말하고 기록하며 우는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그 자체가 힐링이죠. 슬펐던 일도 지나간 일이 되거든요.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이만하면 잘 살았다’며 스스로 만족하더라고요. 도리어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요. 그래서 누군가 내 삶에 대해서 듣고, 기억하고, 관심 갖는다는 사실에 위로받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인생노트(해피엔딩노트)’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엔딩노트’는 이미 보편적인 상품이다. 수백 종의 ‘엔딩노트’가 있다. 인생노트, 생애보, 조문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삶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우리도 지금의 50~60대들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마무리를 고민할 시점이 되면 기록은 더 활발해질 거라 예상해요. 우선 지금 어르신들에 비해 활자에 대한 친숙도가 높아요. 그리고 고도성장을 일궈온 세대이기에 자신의 삶과 그 과정에 느껴온 회한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커요.” 


“슬픔을 나누며 위로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유족 드림

 

포토그래퍼. 김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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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는 길, 아름다운 배웅 ‘조문보(弔問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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